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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 고구려의 문화유적지

집안시(集安市)는 중국 길림성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뒤로는 백두산에 인접하고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오늘의 집안 일대를 고구려현으로 설립하였으며 기원전 37년 북부여에서 온 주몽이 이 지역에서 고구려를 세웠고 고구려 2대 임금인 유리명왕(琉璃明王)이 도성을 오늘의 집안지역으로 옮겨 국내성으로 정하였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1200여 년간 폐허 상태로 있었으며 청나라 말기인 1902년 이곳에 잡안현(辑安县)을 설립하여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에 집안현(集安县)으로 정하였으며 1988년 시급 도시로 부상하였다. 현재 집안은 북한-중국 간 3대 개항지의 하나로 뽑힌다.

집안은 아열대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연 평균 기온이 6.5℃이고 연 평균 강수량이 800~1,000밀리미터이다. 목재, 광물, 약재 등 풍부한 자연자원을 갖고 있으며 고구려 유적을 앞세우는 뛰어난 관광자원이 있다.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은 2004년 압록강 건너에 있는 북한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는 집안 지역의 교통과 경제가 발전 단계에 있지만 고구려 초기에는 이곳이 전 고구려의 경제, 문화, 정치,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 땅에 남겨진 유적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1,400여 년의 세월을 겪은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옛 모습으로 남아 700여 년 고구려의 문화와 전통을 알려주고 있다.

 

관광 고구려 유적중에는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고구려 20世 임금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인정), 천하제일비(天下第一碑)로 부르는 광개토 태왕 비석, 동구(洞沟) 고분군, 옛 국내성, 고구려 귀족 무덤 벽화 등 5개의 국가급 문화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장군총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은 웅장한 모습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흡사하여 널리 알려졌다.

산성하귀족묘지(山城下貴族墓地)는 환도산성 아래쪽 입구에 있는 4세기이후 축성된 귀족들의 고분군으로 적석묘積石墓, 봉토벽화묘등 다양한 종류의 고분이 수십기가 분포되어있다

환도산성

암벽윗부분에서 군사를 지휘했다 한다, 환도산성은 여러차례 함락당했다고 한다.

 

산성하귀족묘지

비포장도로 옆에 있다

 

산성하귀족묘지

너무 초라하다

장군총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건축되었는데 고구려 20대 임금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인정받고 있다. 능묘는 1100개가 넘는 화강암블럭을 높이 13m, 7단으로 쌓아세워졌다. 계단을 통해 내부의 석실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다.

장군총

가운데 구멍뚤린 곳이 석분의 위치로 사람이 한사람 서 있다.

 

장군총의 뒷편에 있는 작은 석분. 후궁의 묘소라고 한다.

장군총 후궁묘

많이 손상되어 있다.

 무덤은 대리석을 계단식으로 한층 한층 쌓아 올린 7층 돌무덤이다. 그 중 가장 큰 대리석은 길이 6미터, 너비 1미터, 높이 1미터이며 무게가 32톤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7층이 모두 정방형인데 바닥 면적은 270평방미터로 알려졌다. 무덤의 내실 공간은 놎이 5.5미터, 너비 5미터, 길이 5미터로 입방체 모양에 가깝다. 아쉽게도 내실의 널과 무덤 속의 보물이 오래 전에 도굴을 당해 내실이 거의 텅 비어 있는 상태로 알려졌다.

장군총 옆모습

뒷쪽을 받치는 받침돌이 하나 없어져,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임금으로 호태왕으로도 불렀으며 일생동안 고구려 영토를 대폭 넓혔다. 광개토 태왕 비석은 높이가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을 조각하여 만들었는데 비석 위에 총 1,775개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문자들은 주로 광개토 태왕이 일생동안 고구려 국토를 넓히고 백제와 왜국을 정벌하던 빛나는 업적을 기록하였으며 고구려 건국 초기의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고구려 시기의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가장 완벽한 역사 정보이다.

 

귀족 무덤의 벽화

집안시 동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고구려 말기의 귀족 무덤들이 있다. 귀족 무덤의 내실에는 놀라울 만큼 훌륭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 5개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가 가장 유명하다. 5회무덤(五盔墓) 무덤의 내실 입구 양측 벽에 무기를 든 고구려 무사가 그려져 있고 내실 안의 벽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青龙, 白虎, 朱雀, 玄武 이상은 고대 전설속에 각각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4대 신이다) 등이 그려져 있으며 연꽃과 불꽃으로 구성된 그물 무늬의 도안이 그려져 있다. 또 고대 신화에 나오는 복희 (伏羲), 여와(女娲), 신농씨(神农氏)- (고대 신화에서 나오는 인류의 시조(始祖), 중국에서 이 세 신화 인물들을 3황(三皇)으로 모신다.) 등 신들이 횃불을 들고 무덤 주인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그림도 새겨져 있다.

벽화 소장 박물관

돈을 내야 들어갈수 있다.

고구려 벽화그림

고구려 벽화그림

고구려 벽화그림

그 외에도 훌륭한 벽화들이 많이 있는데 내용이 풍부하고 예술적 가치가 높아 고구려 시기의 뛰어난 예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성(国内城) 국내성은 서기 3년부터 서기 427년까지 줄곳 고구려의 도성으로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인 통구평원(通沟平原)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용산(龙山)에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칠성산(七星山) 기슭까지 뻗어있다. 2,000여 년 세월을 겪어 온 국내성은 오늘까지 고구려 도성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고구려의 제20대왕 장수왕이 그의 부친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비. 동북아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금석문으로 높이 6.39m, 폭 1.34~2m의 석비의 사면에 세겨진 문자는 총1775자(풍화에 의해 판독가능한 것은 1600자정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광개토대왕'이란 명칭은 '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태왕이라 부른다. 왜그런지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모두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고구려개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이 부친 고국양왕의 서거로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412년 사망시까지 그의 일생에 대해서 기술. 제2단은 재위기간의 공적이 8년 8조에 걸쳐서 기술되어있다. 395년에는 고구려의 북서쪽에 있던 패려稗麗로의 친정親征, 396년에는 백제로의 친정으로 치세최대의 전과를 일궈내고, 398년에는 북동에 있던 숙진을 정벌. 400년에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하여 왜와 가야를 격퇴, 404년에는 왜와 전쟁, 410년에는 동부여에 친정. 여기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을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성과는 '함락된 성이 64, 획득한 마을이 1400'이라는 숫자로 기록되어있다. 제3단은 왕의 사후 왕릉을 지키기위해 동원된 가족의 이름이 나열되어있다.

 

광개토대왕비

촬영이 안되어서 가져온 사진

또한 광개토대왕릉에 대해서 '장군총'과 '태왕릉太王陵' 2군데를 후보로 들고 있으나, 도굴로 인해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서 현재까지는 정확한 확인이 안되고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이 비문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1883년, 참모본부에서 중국으로 탐색지령을 받은 사카와 가게노부酒勻影信 라는 군인이 집안에서 비문의 탁본을 입수, 그것을 갖고 일본에 돌아가면서부터이다.

비문의 내용은 바로 해독이 되었지만, 비문의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일본, 중국, 한국 모두 드문데다가 특히 '신묘년辛卯年'의 부분에서는 일본에 의해 조작이 되어 일본의 한국식민지배를 정당화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일본의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의 문자가 풍화로 인해 판독불가하여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사이에 해석이 달랐다는데 있었다.

일본측의 해석은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로서 '□□'는 '임나(가야)'라는 설이다. 이것에 비해 한국(이북포함)측의 해석은 주어는 고구려로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공격했다' 혹은 '백제가 왜까지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토벌하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 廣開土大王陵

 광개토대왕비에서 약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많이 손상되었지만 계단을 통해 상부의 대왕과 왕비의 관이 있는 석실까지 올라가 볼 수가 있다.

광개토대왕릉

잔 돌무덤으로 회손이 심각하다

 

 

광개토대왕릉

계단으로 올라가 석분으로 들어가기전 촬영사진

 

광개토대왕릉

석분안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관리하는 분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석실문들 닫아 주었다

 

국가수리풍경구 압록강 國家水利風景區 鴨綠江

집안시내는 남으로 압록강을 면하고 있다. 강폭은 100m에도 못미쳐보이는데 물살이 좀 세서 그렇지 수영이 좀 되는 사람이라면 헤엄쳐서 건널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강에서는 유람선이 떠다니고 강을 따라 산책로가 나있다. 중국인민들이 강건너 북한땅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사진을 찍고 있다.

해가 떨어지면 불야성을 이루는 집안시내와는 달리 이북쪽은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의 세계로 돌변한다고 한다.

압록강 건너 북한모습

산에 나무가 없다. 탈북을 막기위한 조치라고 한다

압록강 건너편 북한

깨끗한 압록강물 건너에는 우리 한민족이 살고 있다. 남의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땅을 촬영하다니..

 

압록강

보트관광으로 북한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수가 있다. 손을 잘 흔들어 준다

 

 

중국의 강

넗이는 한강크기만 한 이름모를 중국의 강

 

출처 : http://www.e-worldphoto.com